슬며시 다시 앉네 李亮淵(이양연)
내 도롱이 빛이
풀빛을 닮았어요
백로가 풀인 줄 알고
내가 있는 시냇가에 내려와 앉았어요
일어서면 혹시
깜짝 놀라 훨훨 날아가 버릴까봐
일어설까 하다가
슬며시 다시 앉아요
蓑衣混草色(사의혼초색)
白鷺下溪止(백로하계지)
或恐驚飛去(혹공경비거)
欲起還不起(욕기환불기) *원제: 白鷺(백로)
풀빛 도롱이를 입은 사람이 보슬비를 맞으며 무언가를 하고 있었나보다. 백로 한 마리가 풀로 착각하고 그의 바로 옆에 날아와 앉는다. 그는 이제 막 일어날까 하다가 다시 살짝 주저앉는다. 혹시 백로가 깜짝 놀라서 훨훨 날아가 버릴까봐, 그는 풀인 척 하염없이 그렇게 앉아 있다. 언제까지? 백로가 날아가고 싶어서 날아갈 때까지.
자연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배려하는 시인의 마음이 오롯하게 드러나 있는 시다. 이 시를 지은 조선후기의 시인 이양연(李亮淵:1771-1853)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의 마음은 다 이렇다. “냉이 한 포기까지 들어찰 것은 다 들어찼구나/ 네 잎 클로버 한 이파리를 발견했으나 차마 못 따겠구나/ 지금 이 들녘에서 풀잎 하나라도 축을 낸다면/ 들의 수평이 기울어질 것이므로” 정채봉 시인의 [들녘]이다. “살아 있는 것을 해치지 마세요/ 무당벌레도 나비도/ 희뿌연 날개가 달린 나방도/ 즐겁게 울어 대는 귀뚜라미도/ 팔딱팔딱 뛰어오르는 여치도/ 춤추는 각다귀, 똥똥한 풍뎅이도/ 땅을 기어 다니는 해 없는 지렁이도” 영국의 시인 로세티의 [살아 있는 것을 해치지 마세요]다.“발밑에 가여운 것/ 밟지 마라,/ 그 꽃 밟으면 귀양 간단다./ 그 꽃 밟으면 죄 받는단다.” 나태주 시인의 [앉은뱅이꽃]이다. “아기염소가 풀을 뜯는 사이/ 할머니는/ 그 옆에서 조알조알 졸고 있다// 배가 부른 아기염소는/ 할머니가 깰까 봐/ 그 옆에서 다소곳이 엎드려 있다// 염소 꼬리 같은 저녁 해가/ 서산으로 꼬리를 감춘다// 아기염소가 그만 집에 가자고/ 매애~ 운다/ 할머니가 알았다고/ 하아~ 하품을 한다// 할머니는 아기염소를 앞세우고/ 졸면서 따라가고/ 아기염소는 할머니를 모시고/ 느릿느릿 앞서 간다” 정성수 시인의 [할머니와 아기염소]다. “..../헐떡이는 작은 새 한 마리/ 둥지에 다시 넣어줄 수 있다면/ 사는 일 결코 헛되지 않을 거예요”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애타는 마음 하나 달랠 수 있다면]이다. “강화섬은 연꽃 같은 섬이다/ 비석 세우지 마라/ 꽃 가라앉는다/ 화력발전소라니!” 김영무 시인의 [강화도]다.
하지만 사람들은 연꽃 같은 섬에다 화력발전소를 기어이 세운다. 왜 그럴까? 그것이 궁금하면 김용택 시인의 [짧은 이야기]를 읽어보면 된다. “사과 속에 벌레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과는 그 벌레의 밥이요, 집이요, 옷이요, 나라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벌레의 집과 밥과 옷을 빼앗고/ 나라에서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누가 사과가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정했습니까/....” 요컨대 지구 위의 만물을, 만물이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연꽃 같은 섬에다 화력발전소를 기어이 세우고야 마는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그렇게 정했는가. 정하는 과정에서 만물과의 연석회의를 통하여 그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수렴하는 민주적 절차라도 거쳤더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