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 연재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
신체활동 부족, 스트레스, 환경오염, 불규칙한 생활습관 등으로 인한 만성질환은 개인을 넘어 사회적 자본의 심각한 손실로 이어지는 주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비만, 심혈관 질환, 당뇨병, 정신질환 등과 같이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지속되는 만성질환의 개념인 비감염성 질환은 의료비 증가와 함께 사회경제적 부담을 심화시키고 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 전체 사망자의 78.1%가 비감염성 질환으로 인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관련 진료비는 90조 원으로 전체 진료비의 84.5%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은 2030년까지 비감염성 질환으로 인한 전 세계 경제적 부담이 약 47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는 등 만성질환에 의한 문제는 더욱 가중될 전망이다.
이러한 만성질환은 개인의 일상에서의 생활습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생활 환경에서의 예방과 관리를 통해 만성질환의 위험요소를 줄이고자, 세계보건기구(WHO)는 의료보건분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관련한 교육, 환경, 농업, 금융, 교통 등 다양한 분야 간의 협력을 통한 통합적인 접근 방식을 주문하고 있다. 만성질환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질병부담 증가 문제를 선행적으로 겪고 있는 해외 국가들에서는, 사회적인 정책이자 대안적 보건의료체계 중 하나로 공원녹지를 활용한 대응 방안을 도입하고 있다.
그동안 공원녹지공간 노출에 의한 신체활동 증가와 비만율 개선, 고혈압과 당뇨병 위험 감소, 우울증과 스트레스 및 불안 감소 등 만성질환에 대한 녹지의 효과는 다수의 연구를 통해 입증 되어왔다. 물론 이미 200여 년 전 영국의 노동자 도시 버큰헤드와 미국 뉴욕 맨해튼 한가운데에 공공공원이 도입될 때부터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환경오염과 공중위생의 해법으로 공원녹지는 작동 되어왔다. 그러다 전 세계를 휩쓴 COVID-19로 인해 가시적으로 드러난 건강불평등 악화, 사회적 고립 심화, 정신질환 증가 문제는 공원녹지의 의학적, 공중보건적 가치를 다시금 주목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원녹지는 현대 보건의료 시스템과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분야 간 칸막이가 뚜렷한 한국에서는 더욱 교류가 미비한 상태이다.
2000년대 들어 해외에서는 공원녹지의 예방적, 치유적 효과를 만성질환 관리 수단으로 보건의료 체계에서 제도화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녹색처방(Green Prescribing)’이다. 녹색처방은 보건의료인이 환자에게 만성질환의 예방과 관리의 목적으로 공원녹지에서의 활동이나 자연환경 체험을 처방의 방식으로 권고하는 것을 말한다. 녹색처방은 일반적인 의료 처방과 유사한 과정으로 의료인과 상담을 통해 환자 맞춤식으로 이루어진다. 처방에서 활용되는 녹지는 대규모 자연녹지뿐만 아니라 도시의 소공원, 개인정원 등 환자가 자연과 쉽게 교감할 수 있는 모든 장소를 포함한다. 경관감상, 명상, 탐조 등 정적인 활동부터 걷기, 뛰기, 아웃도어짐 등의 동적인 활동, 그리고 단체 스포츠, 가드닝, 공원관리 등 신체적 건강을 증진시키고 정신적 안정을 도모하는 활동 외에도 사회적 교류를 활성화할 수 있는 활동이 처방된다.
녹색처방은 여러 국가에서 성공적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공공 건강 증진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정책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중 국가 보건의료기관과 공원녹지기관이 긴밀한 협력을 통해 보건의료체계 안에서 운영되는 사례는 영국과 미국이 대표적이다. 영국과 미국 각각 국가보건의료제도와 민간의료보험제도라는 기존 보건의료체계와 연동된 방식으로 녹색처방이 시행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국가 보건의료기관인 NHS(National Health Service)가 주축으로, 환자의 주거지와 가까운 1차 의료기관의 일반의(GP)가 환자에게 공원녹지에서의 활동을 처방한다. 정책적으로 NHS는 ‘녹색 사회적 처방(Green Social Prescribing, GSP)’을 도입하여 정신건강 관리에 중점을 두고 있다. 녹색 사회적 처방은 공공의료기관과 지역의 공원녹지 기관 및 시민단체가 함께하는 체계적인 관리와 지원체계가 마련되어 있으며, 의료인과 공원녹지 전문가 간의 소통과 협력을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한 링크워커(Link Worker)라는 전문가가 양성되고 있다. NHS는 COVID-19 이후 녹색 사회적 처방 제도화의 적기로 판단, 7개의 지역을 선정하여 시범사업을 2024년 완료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공녹지를 활용한 다양한 활동이 환자의 정신 건강 개선에 효과가 있음은 물론 의료비 저감에도 기여함을 입증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녹색 사회적 처방은 전국 의료현장과 지역사회로 확대되고 있다.
미국은 연방정부 공원녹지기관 NPS(National Park Service)의 주관하에 공원녹지를 보건 자원으로 활용하는 'Park Rx America' 프로그램을 시작, 공공기관과 비영리단체의 협력과, 민간의료보험회사의 자금적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미국의 녹색처방 Park Rx는 처방전 형태로 제공되는데, 의료인이 처방에 활용하는 전자건강기록(Electronic Health Records, EHR)에 공원녹지의 위치와 특징, 시설, 이용 프로그램 등이 정리된 웹 데이터베이스와 연동되고 있다. 의료인은 시스템을 활용, 환자의 상태에 따라 이용가능한 집 주변 공원을 추천하고, 맞춤형 신체활동을 권장하며, 이후 그 진행 과정을 모니터링한다.
영국과 미국 모두 녹색처방 제도는 국가의 중장기 보건의료는 물론 국토계획의 중장기 로드맵과 연동된다. 조경분야는 제도적 뒷받침속에서 보건의료 전문가들과 협력하여 건강 데이터를 반영한 공원녹지 공간 설계와 활동 프로그램 개발하고 유지 관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아울러 녹색처방의 제도화로 인해 의료기관 내외부 조경, 치유정원 뿐만 아니라 공공 조경 프로젝트가 확대되고 있으며, 이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녹색처방의 제도적 도입은 조경분야의 역할 확장을 기대하게 한다. 조경은 기존의 경관 및 공간 조성을 넘어 국민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지원하고, 중요한 사회적 인프라인 공간을 디자인하고 운영하는 녹색처방의 중요한 축이 될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녹색처방의 효과에 대한 인식 제고와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며, 특히 보건의료 분야와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통해 조경분야의 역할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국내 현실에 맞는 녹색처방의 체계적인 도입과 조경분야의 적극적인 참여는, 건강한 사회 구현이라는 조경분야의 사회적 역할 확대와 산업 성장의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